通信使に関する記録

구로다 가문 문서(黑田家文書) “조선인내빙기(朝鮮人來聘記)”, “조선인귀국기(朝鮮人歸國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의 공식 명칭은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 - 17세기~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이며, NPO법인 조선통신사 연고지 연락협의회(일본)와 재단법인 부산문화재단(한국)이 공동으로 신청하여 2017년 10월 31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기록은 1607년부터 1811년 사이에 일본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초청에 의해 열 두 번에 걸쳐 조선국에서 일본국에 파견된 외교사절단에 관한 자료와 일본과 한국이 가지고 있는 외교 기록, 여정 기록, 문화교류 기록 등 총 333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그 중 일본 소유 자료 209 점)
 이 홈페이지에서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자료 중 구로다 가문 문서 “조선인내빙기” 11권과 “조선인 귀국기” 4권을 소개하며 전체 사진과 판독을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 자료는 후쿠오카번청(福岡藩廳: 당시 지방정부)의 기록인 구로다 가문 문서에 포함되어 있으며, 1764년 에도시대의 제11회 조선통신사에 대한 후쿠오카번의 대응을 기록한 문서입니다. 현재는 규슈역사자료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通信使と福岡藩

가. 조선통신사란
 조선통신사란 조선에서 파견된 사절이다. ‘통신(通信)’ 이란 ‛친교(信)를 통(通)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조선통신사를 둘러싼 교류는 에도시대(江戶時代) 일본과 조선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평화와 우호를 상징한다.
 순조 2년(1802)에 조선 왕조가 역사를 고증하여 규정한 통신사 제도에 따르면, 조선통신사란
1. 조선 국왕이 일본 장군에게 경조사 또는 긴급 안건을 해결하기 위해 보냄
2. 중앙 관인(官人)인 삼사(三使: 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 이하로 구성함
3. 왕의 서한·예물을 휴대함
 등의 조건을 채워야 한다.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에는 국왕사라고 칭한 사자가 61회 있었지만 통신사로 인정되는 사자는 태종 13년(1413)부터 성종 10년(1479) 사이에 단 여섯 번이다.
 토요토미(豊臣) 정권에서는 1590년과 1596년에 두 번을 걸쳐 통신사가 파견되었지만 무위에 그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조선 침략은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을 맞이하였지만 이 전쟁은 조선을 황폐하게 했다. 조선에 출병하지 않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는 송운대사유정(松雲大師惟政)과의 협상을 통해 조선과의 국교회복을 이뤘다. 조선 왕조의 주 목적은 일본과의 화평이며 그 임무는 일본 정세의 파악 및 포로 송환이었으나 중국 명(明)과 청(淸)의 패권 쟁탈로 인한 압력으로 일본과의 우호를 원하게 되었다. 에도막부(江戶幕府)도 통신사에 의한 조선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정권에 국제적인 의용(儀容)을 더해 다이묘(大名: 번주)들을 억제하려 했다. 이렇게 조선과 일본 관계가 친밀해지며 이윽고 통신사는 장군이 바뀔 때를 중심으로 한 경축 사절로 변화해 갔다.
 에도막부는 이 조선통신사의 일본 방문을 ‘장군 일대의 성대한 행사’로서 중요시하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 동안에 조선통신사는 열 두 번 일본을 방문했다. 에도막부의 경사나 장군이 바뀔 때마다 방문하여 조선 국왕의 국서와 에도막부 장군의 답장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제 2 회는 교토(京都)의 후시미(伏見)까지 제 12 회는 쓰시마섬(対馬)까지였지만 그 외에는 에도까지 왕래하며 이 중 제4회부터 제6회에는 닛코(日光)도 방문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정사·부사·종사관의 삼사 이하, 화원(畵員)·의원(醫員)·역관(譯官)·악사(樂士) 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형 사절단이었다. 조선의 수도 한성(지금의 서울)에서 출발하여 반년 이상에 걸쳐 에도까지 왕복 약 3000㎞를 여행하였다. 방문하는 곳마다 통신사는 많은 문인들과 필담 및 창수(唱酬)를 통해 교류하였고, 조선통신사의 선단과 조선통신사 행렬은 많은 민중에게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일본의 각 계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 후쿠오카번(福岡藩)의 대응
 에도막부는 조선통신사를 막대한 비용으로 환영하며 각 번(藩:당시 지방정부)에도 정중한 접대를 지시했다. 생산량 10만 석(石) 이상의 토지를 가진 번은 자비로 통신사를 대접했다. 도로와 다리(배다리)의 정비나 숙박, 식사 외에도 말, 매 등 생물을 포함한 많은 헌상품 및 물품의 운송 등 부담이 컸지만 다이묘도 막부에게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경쟁하며 환대에 노력했다.
 후쿠오카번의 경우 신구(新宮) 앞바다에 떠있는 아이노시마섬(相島·藍嶋)에서 통신사 일행을 맞이하였다. 해상 8㎞, 인구 3, 400명의 작은 섬에 응대를 담당한 인원까지 합하면 2000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사전 준비와 뒤처리를 더하면 엄청난 동원 수였다. 숙소 건물은 매번 신축하였고 식기와 그 외 집기류 등에도 정성을 다했다. 음식과 땔감, 불의 준비는 물론 우물 파기와 큰 배가 정착하기 위한 부두 축조도 때로는 필요하였다.
 날씨가 좋으면 하루만 머물고 다음 숙박지(시모노세키(下關), 이키섬(壹岐)의 가츠모토(勝本))로 이동하였지만, 비바람으로 재해가 오면 며칠 동안 체류하게 되어 음식만으로도 막대한 양이 필요하였다. 1624년의 제3회와 1655년의 제6회는 8일, 1719년의 제9회는 18일간 체류하였고, 이 홈페이지에서 소개하는 1764년 제11회의 경우에는 12월 3일부터 26일까지 23일이나 되었다. 여기에는 통신사 400여 명의 식량 확보와 더불어 모든 여정에서 통신사를 수행하며 감시 역을 맡은 쓰시마번(對馬藩) 관리에 대한 접대도 필요했다. 그 장기 체재에 대한 식량 확보나 수송 같은 실제 고초가 통신사 기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방대한 비용을 지출한 조선통신사가 에도까지 간 것은 이 1764년이 마지막이었다. 일본과 조선 양국의 재정 궁핍으로 인하여 1811년 제12회 조선통신사는 쓰시마에서 접대를 받았다. 이후 중단하고 있는 사이에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조선통신사는 끝을 맞이하였다.

世界の記憶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은 세계의 중요한 기록유산의 보호와 진흥을 목적으로 1992년에 시작된 유네스코의 사업이다. 심사는 2년에 한 번이며 신청은 한 국가 당 두 건 이내로 정해져있다.
 사업의 목적은 1.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록유산의 보존을 가장 적합한 기술로 촉진하는 것, 2. 중요한 기록유산에 많은 사람들이 접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3. 기록유산의 존재와 중요성에 대한 회원국의 인식을 높이는 것이다.
 대상은 필기문서, 책, 신문, 포스터, 도화, 지도, 음악, 필름, 사진 등이며 2017년 10월 현재, 인권선언(프랑스, 2003년), 괴테의 친필 문학작품과 일기, 편지 등(독일, 2001년),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코란(우즈베키스탄, 1997년), 리그베다(고대 인도의 성전인 베다 중 가장 오래된 것)(인도, 2007년) 등 427건이 등재되어 있다.

일본과 관련된 물건의 등록·신청 상황
・2011년 5월 ‘山本作兵衛炭坑記録画・記録文書’ 등재
・2013년 6월 ‘御堂関白記’ ‘慶長遣欧使節関係資料’ 등재
・2015년 10월 ‘舞鶴에 生還’ ‘東寺百合文書’등재
・2017년 10월 ‘上野三碑’ 등재

MEXT(일본 문부과학성) 홈페이지
https://www.mext.go.jp/unesco/006/1373633.htm

NPO법인 조선통신사 연고지 연락협의회 (일본)
https://enchiren.com/

黒田家文書

가. 구로다 가문 문서란
 구로다 가문 문서는 후쿠오카 번주(藩主)인 구로다 가문에 전해 내려온 총 597건, 1016점에 이르는 에도시대(江戶時代) 중기 이후 후쿠오카번청(福岡藩廳: 당시 지방정부)의 기록이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 번을 폐지하고 대신 중앙이 관리하는 부(府)와 현(縣)을 신설한 행정 개혁(廢藩置縣)이 이루어진 후, 문서는 그 대부분이 도쿄(東京)의 구로다 저택과 후쿠오카시 주오구(中央區) 하마초(浜町)의 구로다 별장, 후쿠오카시 주오구(中央區) 니시코엔(西公園)의 데루모신사(光雲神社)로 옮겨졌으나, 1945년의 전쟁으로 도쿄의 구로다 저택 1호 창고를 제외하고 전부가 소실되었다.
 구로다 가문 문서는 전쟁 후 미쓰이창고(三井倉庫)에 보관되어 있었다. 1963년경 고(故) 지쿠시 유타카(筑紫豐) 씨가 구로다 가문과 교섭하여, 1964년에 구로다 나가미치(黑田長禮) 씨가 구로다 가문의 집사인 후지이 진타로(藤井甚太郞) 씨가 수집한 40 점을 포함한 서책 470권을 후쿠오카현에 기증하였다. 문서는 후쿠오카현립도서관에 보관되었다.
 그 후 1979년에 후쿠오카시미술관에 약 1000점이 기증되었고, 1990년 후쿠오카시박물관 개관에 즈음하여 미술관의 구로다 가문 문서는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후쿠오카시박물관이 소장한 구로다 가문 문서는 미정리 자료를 포함하여 총 약 3000점으로 예상되어있다. 이 밖에 지쿠시여학원(筑紫女學園)에도 도쿄의 고서점에서 구입 한 구로다 가문 문서가 약 296 점 보관되어 있다.
 후쿠오카현에는 1974년 구로다 가문으로부터 추가로 문서가 기증되어 후쿠오카현립도서관에 보관되었다.(제2차) 뒤이어 1995년도에도 나카하라 사토시(中原三十四) 씨가 고서로 유통되고 있던 것을 구매하여 후쿠오카현립도서관에 기증하였다.(제3차)
 2017년 10월에 구로다 가문 문서 중 에도시대의 제11회 통신사 기록 15권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을 계기로 2018년에 후쿠오카현립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세계기록유산’ 등재 자료 15권을 포함한 구로다 가문 문서가 규슈역사자료관으로 이관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 자료 15권은 현립도서관의 사업으로서 수리를 실시했다.

나. 구로다 가문 문서의 조선통신사 기록
 에도시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열 두 번 파견된 조선통신사 중 구로다 가문 문서에는 1682년 제7회, 1711년 제8회, 1719년 제9회, 1748년 제10회, 1764년 제11회의 기록 50권이 남아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한 소실 때문인지 누락이 많아 본래 존재한 기록의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아있다고 보여진다.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 쓰시마섬(對馬), 이키섬(壹岐)을 거쳐 지구젠(筑前) 지역에 속한 아이노시마섬(藍嶋: 현재의 후쿠오카현 가스야군(糟屋郡) 신구마치(新宮町) 아이노시마섬(相島))에 이르렀을 때, 후쿠오카번이 한 영접, 연락 조정, 대접, 경비 등 일체의 대응이 후쿠오카번의 조선통신사 기록에 기록되어있다.
 이 홈페이지에서는 에도막부 10대 장군 이에하루(家治)의 취임 축하를 위해 1764년에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의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전년의 준비에 대한 기록도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지 구로다 가문 문서의 명칭으로는 ‘계미년(1763년)’이라고 연도 표기가 되어있다.

범례 및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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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례】
·이 홈페이지에서는 유네스코 세계기억에 등록 된 자료 중 구로다 가문 문서(黑田家文書) “조선인내빙기(朝鮮人來聘記)” 11권 “조선인귀국기(朝鮮人歸國記)” 4권을 소개하여 전체 사진과 번각(翻刻)을 게재 한다.
·게재 한 번각문은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의 고문서를읽는회가 편찬 한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 (福岡藩朝鮮通信使記録) 8·11·13”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 1999~2000년)에 의거하여 원문과 비교하며 확인하였다.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8·11·13”에서 候, 等, 并, 々 등은 원본의 글자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활자로 고쳤다. 또한 변체가나(変体仮名: 근대에 폐지된 글자) 인 而, 江, 者, 之, ニ 등은 한자/가타카나로서 그대로로 하였으나 ゟ는 “요리”로 고쳤다.
·원본에는 행간에 검은색 또는 빨간색 작은 글씨로 추가된 문장 등이 있으나 여기에서 그대로 배치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사진에 찍혀진 면마다 번각문 끝에 모아서 게재하였다.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8·11·13”는 원본의 줄바꿈과 상관없이 단락마다 문자를 정리하고 있으나 이 홈페이지에서는 원본의 줄바꿈과 배치를 최대한 따라하였다.
·상기 이외는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8·11·13”의 번각문에 준했다.
·번각문의 원본과의 대조 및 교정은 이시바시 류우고(石橋龍吾) · 시바야마 카즈요(柴山和代) · 토키사토 쿠미코(時里久美子) · 모로하라 마키(諸原真樹) · 요코야마 타카시(横山尊)의 협조를 받았다.
·구로다 가문에서 후쿠오카현에 쿠로다문서를 기증 한 경위는 전 소장 기관인 후쿠오카현립도서관 향토자료과에서 자료 제공을 받았다.
·영어와 한국어 페이지의 번역문 확인은 영어는 모로하라씨·요코야마씨에게, 한국어는 큐슈국립박물관 교류과 국제교류원 인 김은정(金恩正)씨에게 협조를 받았다.
·홈페이지에 게재 한 “조선인내빙기”와 “조선인귀국기”의 사진은 후쿠오카현립도서관과 큐슈역사자료관이 소장한다.
※게재·제공 등을 원할 경우 큐슈역사자료관에 신청하십시오. (절차 안내는 여기).
·기타 홈페이지에 게재 한 사진은 큐슈역사자료관이 소장한 것 이외는 이와쿠니징고관, 큐슈국립박물관, 신구정교육위원회에서 제공 받았다. 제공받은 사진은 위에서부터 쇼토쿠원년조선통신사행렬그림(徳元年朝鮮通信使参着帰路行列絵巻: 큐슈국립박물관 제공, 오치아이 하루히코[落合晴彦]촬영), 아이노시마그림(藍嶋絵図: 이와쿠니징고관 제공), 아이노시마적석총군120 호분(相島積石塚群120号墳: 신구정교육위원회 제공) 이다. ·홈페이지의 구성과 설명문은 큐슈역사자료관 학예조사실 기획주사(主査)·학예원 사카이 요시지(酒井芳司)가 담당하였다.

【참고 문헌】
이원식(李元植) · 오오하타 아쯔시로(大畑篤四郎) · 신기수(辛基秀) · 타시로 카즈오(田代和生) · 타나카 타케오(田中健夫) · 나카오 히로시(仲尾宏) · 요시다 히로시(吉田宏志) · 이진희(李進熙), “조선통신사와 일본인”, 학생사, 1992년
이케우치 사토시(池内敏), “"唐人살인”의 세계 - 근세민중의 조선인식”, 린젠서점, 1999년
교토문화박물관, 교토신문사 편·발행 “21세기기념특별전 마음의교류 조선통신사 -에도 시대부터 21세기를 향한 메시지”, 2001년
재단법인 서일본문화협회 편 “후쿠오카현역사 통사편 후쿠오카번(1) “, 후쿠오카현, 1998 년
후쿠오카시박물관 편·발행 “구로다 가문 문서 제 1 권”, 1999년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 고문서를읽는회 편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 1”, 후쿠오카지역 사연구회, 1993년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 고문서를읽는회 편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2”, 후쿠오카지역 사연구회, 1994년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 고문서를읽는회 편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8”, 후쿠오카지역 사연구회, 1999년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 고문서를읽는회 편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11”, 후쿠오카지역 사연구회, 2000년
후쿠오카지역사연구회 고문서를읽는회 편 “후쿠오카번 조선통신사기록13”, 후쿠오카지역 사연구회, 2000년